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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3·1운동 박치화 후손 103년 만에 조부 공훈비 앞에 서다

경남독립운동硏, 비 건립에 힘쓴 하동군민에 감사…생가 복원과 문화유산 등록 기대

박재만 선임기자 | 기사입력 2022/10/18 [08:39]

하동 3·1운동 박치화 후손 103년 만에 조부 공훈비 앞에 서다

경남독립운동硏, 비 건립에 힘쓴 하동군민에 감사…생가 복원과 문화유산 등록 기대
박재만 선임기자 | 입력 : 2022/10/18 [08:39]

▲ 하동 3·1운동 박치화 후손 103년 만에 조부 공훈비 앞에 서다

 

하동에서 1919년 3월 지방 유일의 독자적 ‘대한독립선언서’를 만들어 선포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한 일산(一山) 박치화(朴致和·1880∼1947·하동군 적량면) 선생의 후손 20여명이 선생의 생가와 공훈비가 세워진 하동을 방문했다.

 

지난 17일 캐나다 앨버타주에 거주하는 선생의 외손자 정정식(83)씨와 대구 수성구 이종섭(85)씨, 종손자 부산 남구 박명신(87)씨 등 경향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후손 20여명이 하동군 적량면 두전마을을 찾아 한자리에 모였다.

 

후손들은 3·1운동 103년 만에 하동군민의 이름으로 세운 ‘독립운동지도자 박치화 공훈비’ 앞에서 헌화와 참배 헌시 낭송을 했다. 이후 생가와 하동읍 소재 하동독립공원을 둘러보며 선열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렸다.

 

이날 행사에는 경남독립운동연구소 정재상 소장의 안내와 함께 하동독립운동기념사업회 노영태 회장, 박영일 부회장, 오대식 사무국장, 광복회 대구 수성구 박근용 지회장, 하동군청 배선윤 계장, 적량면 부면장, 두전마을 이장이 자리를 같이했다.

 

서울에 거주하는 선생의 외손자 정남식(82)씨는 “외조부의 선양사업에 힘쓰고 있는 하승철 군수와 정재상 소장 그리고 하동군민께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한다”며 “공훈비를 보니 그저 감정이 북받쳐 눈시울이 붉혀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랜 풍우에 낡고 허물어진 조부의 생가복원에 군의 지대한 관심도 부탁했다.

 

선생의 공훈비는 2019년 정재상 소장이 당시 윤상기 하동군수께 ‘박치화 독립유공자 예우관련 공개 서한문’을 보내면서 사업을 추진, 기념사업회를 구성하고 정재상 소장이 비문을 짓고, 한국서예협회 정대병 상임부이사장이 비문을 쓰고, 하동군이 2020년 건립했다. 현재 군에서는 생가복원을 통해 근대문화유산 등록을 추진 중이다.

 

선생은 1919년 3월 14일 하동군 적량면 면장 직을 돌연 사직하고, 전국에서 지방 유일의 독자적 ‘대한독립선언서’를 만들어 3월 18일 하동장날 장터에서 12인이 함께 선포, 영호남 지역민 1500여 명과 대한독립만세 시위를 했다.

 

이 같은 일로 체포돼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렀다. 하동 ‘대한독립선언서’는 2015년 국가지정 기록물 제12호로 등록됐다.

 

선생은 3·1운동 이후에도 상해 임시정부에서 요직을 맡고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1927년 10월 상해 임시정부에서 선생에게 수여한 신임장과 통지서에는 박치화에게 ‘법무원 법률판리사(法律辦理事) 겸 경상남도찰리사(慶尙南道察理使)’와 임정 재무모집기주원(財務募集記主員)의 직책을 부여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 문서는 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다.

 

선생의 아우 박문화(朴汶和·1901∼1950)도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이후 체포돼 진주법원에서 태형 90도를 받았다. 선생의 아들 박성무(朴性茂·1913∼?) 또한 독립운동에 가담해 1934년 5월 체포돼 9월 17일 전북 전주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 형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박치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아우 박문화에게는 1998년 대통령표창을 각각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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